프리츠 셰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리츠 셰퍼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1888년 뮌헨에서 태어나 1967년 사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후 바이에른 인민당에서 활동하며 바이에른주 주의회 의원과 당 의장을 역임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바이에른주 주총리를 지냈다. 이후 서독 정부에서 재무장관과 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재임 기간 중 긴축 재정 정책을 펼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당원 - 에드문트 슈토이버
에드문트 슈토이버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정치인으로, 1993년부터 2007년까지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으며, 2002년 독일 연방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당원 - 만프레트 베버
만프레트 베버는 독일의 정치인이자 유럽 인민당 소속으로, 뮌헨 응용 과학 대학교에서 엔지니어링 학위를 취득한 후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바이에른 주의회 의원을 거쳐 2004년부터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유럽 인민당 그룹 의장,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 후보를 역임, 2022년부터 유럽 인민당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바이에른주의 주총리 - 쿠르트 아이스너
쿠르트 아이스너는 독일의 저널리스트, 정치인, 혁명가로서 제1차 세계 대전 반전 운동을 주도하고 바이에른 혁명을 통해 바이에른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암살당했으며, 독일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평화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 바이에른주의 주총리 - 에드문트 슈토이버
에드문트 슈토이버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정치인으로, 1993년부터 2007년까지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으며, 2002년 독일 연방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독일의 재무장관 - 오스카르 라퐁텐
오스카르 라퐁텐은 독일의 정치인으로, 자를란트주 주총리,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 연방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SPD 내 좌파로 활동하며 좌파당 결성을 주도했다. - 독일의 재무장관 -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슈미트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서독의 연방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으로, 동서독 화해 정책을 계승하면서 서방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유럽 통합에 기여했으며, 경제 위기와 테러에 단호하게 대처하여 서독의 안정을 유지했으나 연정 파트너와의 갈등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독일 정치사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프리츠 셰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프리츠 셰퍼 |
원어 이름 | Fritz Schäffer |
국적 | 독일 |
출생일 | 1888년 5월 12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
사망일 | 1967년 3월 29일 |
사망지 | 서독 바이에른주 베르히테스가덴 |
소속 정당 |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1945년부터) |
과거 소속 정당 | 바이에른 인민당 (1918–1933) |
경력 | |
임기 시작 | 1945년 5월 28일 |
임기 종료 | 1945년 9월 28일 |
이전 | 파울 기슬러 |
이후 | 빌헬름 회그너 |
임기 시작 | 1949년 9월 20일 |
임기 종료 | 1957년 10월 29일 |
수상 | 콘라트 아데나워 |
이전 | 직책 재수립 |
이후 | 프란츠 에첼 |
임기 시작 | 1957년 10월 29일 |
임기 종료 | 1961년 11월 14일 |
수상 | 콘라트 아데나워 |
이전 | 한스-요아힘 폰 메르카츠 |
이후 | 볼프강 슈탐베르거 |
임기 시작 | 1931년 9월 16일 |
임기 종료 | 1933년 3월 16일 |
대통령 | 하인리히 헬트 |
군 복무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복무 기간 | 1915–1916 |
2. 생애
프리츠 셰퍼는 1888년 뮌헨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전후 바이에른 인민당에 입당하여 1920년 주의회 의원이 되었고,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당 의장을 역임했다.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잠시 구금되었고, 석방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4년 7·20 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 군정에 의해 바이에른 주총리로 임명되었으나 곧 해임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 창당에 참여했고, 잠시 정치 활동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1949년 서독 초대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에서 연방 재무장관(1949-1957)과 연방 법무장관(1957-1961)을 지냈다. 1961년 장관직과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했으며, 1967년 3월 29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8년 5월 12일 뮌헨의 가톨릭 가정에서 고트프리트 셰퍼와 아말리아 마이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잉골슈타트, 뮌헨, 도나우노이부르크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15년 바이에른 보병 친위 연대에 자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세르비아와 티롤에서 복무한 후, 1916년 5월 베르됭에서 부상을 입고 군 복무에서 해제되었다.
전쟁 후인 1917년 바이에른 주 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9월 엘제 디로프와 결혼했다.
2. 2. 바이에른 인민당 시절
셰퍼는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전후 바이에른 주정부 내 내무부와 지역 관청에서 잠시 일했다. 1918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에른 인민당(BVP)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바이에른 주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33년까지 주의회 의원직을 유지했다. 1929년에는 바이에른 인민당의 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1933년까지 당을 이끌었다.
초기 정치 경력 중 몇 차례 반유대주의적 연설을 한 기록이 있으며, 이는 이후 그의 정치 활동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이에른에서 나치당의 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31년에는 나치당의 SA로부터 보수 정치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이에른 방위대''(Bayernwachtde)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셰퍼는 나치당을 견제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나치당과 중앙당을 포함하는 연립 정부 구성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마지막 바이에른 왕세자였던 루프레히트를 독재적 권한을 가진 ''국가 위원''(Staatskommissarde)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바이에른 주 총리였던 하인리히 헬트는 셰퍼가 총리직을 노린다고 의심하며 이를 반대했고,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바이에른 주정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셰퍼는 나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잠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2. 3. 나치 정권 하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직전, 셰퍼는 나치의 부상에 맞서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바이에른에서 나치의 권력 장악에 반대했으며, 1931년에는 SA로부터 보수 정치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인 ''바이에른 방위대''(Bayernwachtde) 결성에 참여했다. 또한, 나치당과 중앙당을 포함하는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나치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세자인 루프레히트를 '국가 위원'(Staatskommissarde)이라는 독재적 지위에 올려 나치에 대항하려 했으나, 당시 바이에른 주 총리 하인리히 헬트가 셰퍼 자신이 총리가 되려 한다고 의심하여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1933년 나치당이 독일 전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바이에른 주정부를 해산시키면서, 셰퍼는 나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잠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석방된 이후 나치 정권 하에서는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4년 7·20 음모 사건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과정에서 다시 당국에 체포되어, 그해 8월부터 10월까지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2. 4. 전후 정치 활동 및 기사련 창당
1945년 5월, 바이에른 지역을 점령한 미 군정은 셰퍼를 바이에른 주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 나치 인사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같은 해 9월 미 군정에 의해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특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셰퍼의 반유대주의적 과거 발언과 전직 나치 당원들을 자신의 행정부에 기용한 점 또한 문제 삼았는데, 이는 그를 임명했던 조지 S. 패튼 장군과는 다른 입장이었다.[1]
같은 해, 셰퍼는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하 CSU) 창당 과정에 공동 창당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당내 보수파의 지도자로 부상하며, 당을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형태로 만들고자 했던 자유주의 성향의 당 대표 요제프 뮐러와 정치적, 종교적 노선을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셰퍼는 과거 바이에른 인민당(BVP)처럼 가톨릭 중심의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뮐러가 당권을 장악하자, 셰퍼는 바이에른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바이에른당과의 연계를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 미 군정은 셰퍼가 주총리 시절 나치 인사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와 나치 동조 혐의로 1946년부터 2년간 그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는 1948년에야 이 혐의를 벗고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1949년 서독에서 치러진 첫 연방의회 총선에서 셰퍼는 파사우 선거구에 CSU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총선을 통해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의 콘라트 아데나워가 초대 연방 총리로 선출되었고, 셰퍼는 아데나워 내각의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57년까지 재직했다. 재무장관 시절 그는 독일 통화 안정을 위한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하며 연방 정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긴축 정책은 나치 통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요구를 강력히 거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3] 또한 국방비 증액을 거부하여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회원국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1]
1957년 총선 이후, 아데나워 총리는 셰퍼의 긴축 재정 정책이 독일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그를 내각에서 제외하려 했다. 정치적 협상 끝에 셰퍼는 재무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법무장관직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2] 1961년, 셰퍼는 장관직과 연방의회 의원직에서 모두 물러나며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1967년 3월 29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사망했다.
2. 5. 서독 연방정부 시절
1949년 서독 첫 총선에서 파사우 선거구에 기사련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1961년까지 독일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총선 결과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의 콘라트 아데나워가 초대 연방 총리로 선출되자, 셰퍼는 아데나워 제1기 내각의 초대 연방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57년까지 재직했다.재무장관 시절 셰퍼는 독일 통화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당시 연방 정치에서 그를 두 번째로 강력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는 나치 통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요구를 강하게 거부했으며,[3] 국방비 증액을 꺼려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 동맹국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1]
1957년 총선 이후, 아데나워 총리는 셰퍼의 긴축 정책이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그를 내각에서 제외하려 했다. 하지만 정치적 협상을 통해 셰퍼는 연방 법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1961년까지 재임했다.[2] 1961년, 셰퍼는 장관직과 의원직에서 모두 물러나며 정계를 은퇴했다.
2. 6. 정계 은퇴 및 사망
1961년 장관직과 의원직에서 물러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1967년 3월 29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사망했다.3. 비판 및 논란
프리츠 셰퍼는 정치 활동 기간 동안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기독교 사회 연합(CSU) 창립 당시, 당 대표 요제프 뮐러가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정당을 지향한 것과 달리, 셰퍼는 과거 바이에른 인민당(BVP)처럼 가톨릭 중심의 보수적인 정당을 만들려 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재무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그의 엄격한 긴축 재정 정책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 이후 국방비 증액 문제로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 회원국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국방 예산 확대를 거부하는 그의 입장은 동맹국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1] 이러한 긴축 기조는 결국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1957년 그를 재무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2] 이 외에도 그의 초기 정치 경력에서의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나치 부역자 기용 문제, 나치 피해자에 대한 배상 거부 등은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3. 1. 나치 부역자 채용 논란
1945년, 조지 S. 패튼 장군은 프리츠 셰퍼를 바이에른의 초대 전후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셰퍼를 해임했다. 아이젠하워는 셰퍼가 과거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던 사실과 더불어, 나치에 부역했던 인물들을 자신의 행정부에 기용한 점을 문제 삼았다.[1] 이는 셰퍼의 나치 부역자 채용을 문제 삼지 않았던 패튼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이 일로 셰퍼는 나치 동조 혐의를 받아 1948년까지 미국 당국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후 혐의를 벗고 정치에 복귀할 수 있었다.3. 2. 반유대주의 언행 및 배상 거부
셰퍼는 초기 정치 경력에서 몇 차례 반유대주의 연설을 했으며, 이는 그의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1945년, 바이에른의 초대 전후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반유대주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몇 달 만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에 의해 해임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셰퍼가 과거 나치당 관련 인물들을 자신의 행정부에 기용한 점도 문제 삼았다.[1] 이로 인해 그는 나치 동조 혐의로 1948년까지 정치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이후 정치에 복귀하여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독일 연방 공화국의 재무 장관을 역임하는 동안, 셰퍼는 나치 통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3]
참조
[1]
간행물
Power Grabber
https://web.archive.[...]
Time
1956-02-20
[2]
서적
Konrad Adenauer: A German Politician and Statesman in a Period of War
https://books.google[...]
JHU Press
2008-05-08
[3]
서적
Paying for the Past
https://archive.org/[...]
JHU Press
2008-05-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